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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 개관


천도교의 종지(宗旨)는 ‘인내천(人乃天)’이다. 곧 ‘사람이 이에 한울님’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천도교의 종지는 천도교의 3세 교조인 의암성사 때에 부각된 것으로, 오늘까지 천도교 종단(宗團)의 종지가 되고 있다.

이 ‘인내천’은 의암성사 시대에 정해진 종단의 종지이지만, 대신사가 천명(闡明)한 ‘시천주(侍天主)’에 그 근원을 둔 것으로, 천도교의 종교적 핵심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대신사는 포덕 1년(1860) 4월 5일 결정적인 종교체험을 통하여 한울님이라는 절대의 신이 다른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들 몸에 주체적으로 모셔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이와 같은 깨달음과 함께 ‘내 몸에 한울님을 모셨다’는 의미의 ‘시천주(侍天主)’를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요체로 삼게 된다.

대신사에 의하여 천명(闡明)된 ‘시천주 사상’은 해월신사에 이르러 ‘사람이 곧 한울’이라는 ‘인시천(人是天)’으로 표명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님 같이 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사회적 윤리로 발전, 실천되게 된다.

따라서 천도교는 인내천의 종지와 함께 바로 이 사인여천을 사회적 실천윤리로 삼고 있기도 하다.

‘시천주’에서 ‘인시천’으로, 나아가 ‘사인여천’의 윤리로 거듭 뻗어나간 천도교의 가르침은 의암성사 때에 이르러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人乃天)’을 내놓게 되었고, 이 인내천을 천도교의 종지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이에 한울’이라는 ‘인내천’을 종지로 삼았다고 하여 천도교가 인간지상주의(人間至上主義)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한울이듯이, 우주의 모든 만유(萬有) 역시 한울 아님이 없다는 것이 곧 천도교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해월신사의 말씀과 같이 “저 나무 사이에서 울고 있는 새소리 역시 시천주”라는 가르침처럼 이 우주에 가득한 만유(萬有) 역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가르침을 체득하게 되면, “한울님을 공경하듯이(敬天), 사람도 공경을 해야 하며(敬人), 나아가 만유도 이와 같이 공경해야 한다(敬物)”는 해월신사의 삼경사상(三敬思想)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삼경사상 역시 시천주의 또 다른 표현이다. 따라서 이러한 천도교의 사상은 서구의 근대화 이후 대두된 인간중심의 사상이 가지고 있는 폐해를 뛰어넘어 진정한 우주공동체의 삶을 열어갈 수 있는 사상이다.

바로 천도교의 종지가 되는 ‘인내천’은 대신사의 ‘시천주’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 인류가 지향하는 우주공동체의 삶을 이루기 위한 중요한 지표가 된다.

곧 천도교는 후천개벽의 새로운 차원의 시대를 맞아, 인류의 가장 큰 숙원인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넘쳐나는, 인간과 자연, 나아가 인간과 자연과 신이 모두 함께 어우러져 살 수 있는 ‘우주 공동체의 삶’을 지향하는 종교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이 곧 천도교가 궁극적인 종교적 목적으로 삼고 있는 ‘지상천국의 건설’이기도 한 것이다.


2. 창 도


1) 교조(敎祖)


(1)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

대신사는 1824년(단기 4157) 10월 28일 경주 근교 현곡면 가정리에서 탄생하였다. 성은 최씨요, 이름은 제우(濟愚), 자(字)는 성묵(性默), 호는 수운(水雲)이다. 수운은 어려서 모친을 여의고 17세 때에 부친을 여의었는데 이로 인하여 어릴 때부터 남달리 인생의 무상을 느끼고 어지러운 세상을 건질 수 있는 진리를 찾아 구도에 힘쓰게 되었다.

20년 가까운 수도 고행 끝에 1860년(포덕 원년) 경신(庚申) 4월 5일 한울님의 계시(啓示)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의 새로운 지도 원리인 천도(天道)를 대각하였다. 무극대도(無極大道)인 천도의 이치를 밝히고 온 천하에 포덕하였으며 대법을 세우기 위하여 한울님을 지극히 위하는 글인 주문(呪文)을 지었다.

1863년까지 동경대전(東經大全)과 용담유사(龍潭遺詞) 등 천도교 경전을 펴내어 포덕을 하였다. 교도가 날로 늘어나자 관에서는 동학을 이단시하여 없애려고 하였다. 수운은 포덕한 지 4년째 되던 해(1863년) 8월 14일 수제자 해월신사(崔時亨)에게 대도의 법통을 전수하고 이 해 12월 10일에 에 체포되어 이듬해인 1864년(포덕 5) 3월 10일에 대구장대에서 참형을 당하여 순도하였으니 향년 41세였다.


(2) 제 2세 교조 해월신사(海月神師)

천도교 제2세 교조 해월신사는 1827년 3월 21일 경주 황오리에서 탄생하였다. 성은 최씨요 이름은 경상(慶翔)이다. 5세 때에 모친을 여의고 12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어 천애의 고아로서 소년 시절을 지냈다.

1861년 6월에 동학에 입도하여 37세 되던 1863년 8월 14일에 대신사로부터 도통을 이어 받아 천도교의 제2세 교조가 되었다. 대신사 순도 이후 태백산과 평해, 울진, 영양 등지로 숨어 다니면서 교인들을 수습하고 동학을 재건하는 데 힘쓰는 등 동학의 은도시대 40년 가까이를 이끌어 왔다.

양천주(養天主)의 법설을 통해서 대인접물(待人接物)에 관한 법설을 통해서 ‘사람을 한울님 같이 존엄하게 대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을 가르쳤으며 이천식천(以天食天), 삼경(三敬) 등 많은 법설을 남겼다. 또 대신사의 경전 유고(遺稿)를 20년 가까이 피난길에서 고이 간직하였다가 1880년 6월 강원도 인제에서 동경대전 목판본을 간행했다.

다음해 6월에는 용담유사를 간행하는 등 여러 차례 경전을 간행하여 널리 보급함으로써 포덕이 날로 늘어났다. 그리고 1889년(포덕 31) 11월에는 내칙(內則)과 내수도문(內修道文)을 친히 지어 반포하는 등 내수도의 교화에 힘을 기울었다.

그동안 교세는 충청도와 전라도에까지 크게 떨치게 되어 1892년 10월에 공주에서 대신사 신원운동을 비롯하여 전라도 삼례역 집회와 1893년 2월 광화문 복합상소(伏閤上疏) 등 대신사 신원운동을 전개하였다.

이해 3월에는 충청도 보은(報恩)에서 3만여명의 도인이 20여일간 대내적인 집단 시위를 하여 동학은 대신사의 신원 뿐 아니라 탐관오리의 제거와 외세의 배격을 요구하고 나섰다.

1894년(포덕 35 갑오) 3월 21일에는 역사적 대사건인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초기에 해월은 신중론을 폈으나 청·일 양국군의 개입으로 조국이 위기에 처하게 되자 보국안민을 위하여 9월에 동학군이 재기포(再起包)하였다. 그러나 혁명운동은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신무기와 화력을 당하지 못하였다.

동학혁명 후 해월은 강원도, 충청도, 경상도, 경기도 등지로 피신해 다니면서 동학을 수습하는데 전력을 다했다. 1897년 4월 5일에는 향아설위(向我設位)의 법설을 발표하였다. 해월신사는 1897년 12월 24일 의암성사에게 대도의 법통을 전수하고 1898년 4월 5일 관에 체포되어 한성감옥에서 6월 2일에 교수형을 받아 향년 72세로 순도하였다.


(3) 제 3세 교조 의암성사((義菴聖師)

제 3세 교조 의암성사는 1861년(포덕 2) 4월 8일 청주 근교 대주리에서 탄생하였다. 성은 손(孫)씨요, 이름은 병희(秉熙)다. 의암은 타고난 기질과 성품이 비범하고 영매하며 바다와 같은 도량을 지닌 분이었다.

22세 때 동학에 입도하여 그날부터 과거의 생활을 청산하고 매일 주문(呪文) 3만독을 외우며 짚신 두 켤레 삼는 것을 일과로 하면서 수도에 전념하였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의암은 해월의 명을 받들어 동학군의 통령(統領)이 되어 전봉준과 합세하여 민족자주의 대의를 밝히는데 앞장섰다. 그러나 동학군이 패배를 당한 후 해월 신사를 모시고 강원도 깊은 산속으로 피신하여 후일을 도모하였다.

1897년 12월 24일에 해월신사로부터 법통을 전수받아 제 3세 교조가 되었다. 해월신사 순도 후 그 뒤를 이어 흩어진 교인을 수습하기에 힘썼다.

그후 급변하는 내외 정세의 풍운 앞에 높은 뜻을 품고 외국의 선진문물과 동양대세를 살필 필요성을 절감하여 해외로 나갔다.

1901년 외국 시찰의 장도에 올라 먼저 일본을 거쳐 중국 상해에 들러 국제정세를 살핀 후 일시 귀국하였다.

다음해 3월에 일본에 유학시킬 학생 24명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교육에 힘썼다. 그후 두 번째로 40명의 학생을 일본에 유학케 함으로써 뒷날에 대비하였다.

1903년 노·일전쟁이 일어날 것을 예감하고 이 기회를 계기로 나라의 독립 기초를 굳게 다지는 국민의 개화혁신운동을 1904년(포덕 45)에 전개하였다.

그러나 이용구 등 일부 배교분자들이 친일행위를 자행하게 되자 의암은 크게 분개하여 일진회와의 결별을 전제하고 포덕 46년(1905) 12월 1일을 기하여 동학을 “천도교(天道敎)”로 천하에 선포하였다.

그 이듬해 1월 귀국하여 천도교 대헌(天道敎大憲)을 반포하고 천도교중앙총부를 서울에 설치하였다.

또 72개의 대교구제 실시, 280개의 지방교구를 설치하는 등 근대적인 종교체제를 갖추었다. 1908년 1월 18일 춘암상사에게 대도주(大道主)의 도통(道統)을 전수하였다.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비롯하여 경향 각지에 수많은 교육기관을 개설하여 육영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민족 앞에 독립정신을 고취하면서 국권회복의 길만을 기다려왔다.

1912년에는 우이동에 봉황각을 지어 7차의 수련강도회를 통하여 전국의 지도급 교역자 483명을 수련시켰는데 후일 이들이 각 지방에서 3·1운동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다.

1919년(포덕 60) 3월 1일을 기하여 국내외 여러 지사와 더불어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이를 영도하였다.

의암은 3·1운동의 영도자로써 서대문 감옥에 수감당하여 심한 고문으로 병보석 중 1922년(포덕 63)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순도, 순국하였다.

그의 일생은 온갖 역경과 풍운 속에서 나라와 겨레를 위해 역사를 움직이고 동학을 천도교로 현도시키고 교육, 언론, 문화 창달에서도 선구적 활동을 보였다.

의암은 인내천(人乃天)을 천도교 종지로 밝히고 각세진경(覺世眞經), 수수명실록(授受明實綠), 명리전(明理傳), 삼전론(三戰論), 천도태원경(天道太元經), 무체법경(無體法經), 이신환성설(以身換性說)등 많은 법설을 남겼다.


(4) 제 4세 대도주 춘암상사(春菴上師)

천도교 제 4 세 대도주 춘암상사는 1855년(포덕전 5) 2월 1일 충남 덕산에서 탄생하였다. 성은 박씨요. 이름은 인호(寅浩)다. 상사는 선친의 엄한 가르침을 받아 한 평생을 정직으로 일관하였다.

29세 때에 동학에 입도하여 친히 해원신사의 가르침을 받아 도를 닦았다. 의암과 함께 해월신사를 모시고 공주 가섭사(迦葉寺)에서 수련을 하였으며 10년동안 의관을 풀지 아니하고 술과 담배와 고기와 생선까지 끊고 수도에 전념하여 충청도 일대에서 널리 포덕에 힘썼다.

1893년(포덕 34) 대신사 신원운동때는 덕의대접주(德義大接主)로 많은 도인들을 거느리고 앞장섰고 다음해 갑오동학혁명 때 충청도 일대에서 약 5만명의 동학군을 통솔하고 참가하였다.

1908년(포덕 49) 1월 18일 춘암은 의암성사로부터 도통을 전수받아 제4 세 대도주가 되어 중앙총부의 지도체제를 새롭게 갖추고 교세확장에 힘을 기우렸다.

의암성사를 모시고 그 뜻을 받들어 무엇보다 출판문화와 교육사업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천도교중앙총부 부설로 인쇄 출판부를 설치하고 월보과(月報課)를 신설하여 기관지를 발간 보급하는 한편, 보성학교와 동덕여학교를 인수 경영할 때 춘암이 교주(校主)가 되어 민족교육에 앞장 서기도 했다.

또 천도교는 1911년부터 주문(呪文), 청수(淸水), 시일(侍日), 성미(誠米), 기도(祈禱) 등 오관(五款)을 수도의 요목으로 정하는 동시에 우이동에 교역자의 수련장으로 봉황각을 새로 짓게 되었다.

1918년에는 ‘교리연구부’를 설립하는 한편, 서울 경운동 88번지에 중앙대교당을 건축 기공(바로크 양식으로 유명함)하면서 거교적인 성금을 모았는데 이 성금이 바로 3·1운동 자금으로 쓰여졌다.

3·1운동 때 의암성사는 춘암상사를 민족대표에서 빠지게 하여 뒤에 남아 교회 일을 도맡아 보도록 배려하였으나 춘암상사 또한 48인의 한분으로 체포당하여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38년 8월 14일, 지방 두목을 불러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무인(戊寅) 멸왜기도(滅倭祈禱)운동을 전개하도록 하였다.

춘암상사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변함없는 성실과 정직으로 일관하여 천도교를 지켜 오다가 1940년(포덕 81) 4월 3일 향년 86세로 환원하였다.


2) 교단연혁 및 교단 발전사(민족운동사)

천도교 150여년 간의 역사를 구분한다면 창도시대(創道時代), 은도시대(隱道時代), 현도시대(顯道時代)로 구분할 수 있다.


(1) 창도시대

창도시대는 천도교의 제1세 교조 수운대신사가 1860년(포덕 원년) 4월 초 5일 천도를 대각한 때부터 1863년 8월 14일에 제 2세 교조 해월신사에게 대도의 법통을 전수하고 1864년 3월 10일 대구장대(大邱將臺)에서 참형을 당하여 순도할 때까지를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교단기원(紀元)은 포덕(布德)이며, 경신 1860년이 포덕원년(布德元年)이다.


(2) 은도시대

은도시대는 제1세 교조의 순도한 후 해월신사가 도를 계승하여 지하운동으로 대도를 이끈 시대, 즉 1905년(포덕 46) 12월 1일 동학을 천도교로 천하에 선포하여 현도(顯道)될 때까지를 말한다.


(3) 현도시대

현도시대는 의암성사께서 천도교(天道敎)로 대고천하(大告天下)한 후로부터 오늘에 이르는 시대를 말한다.

천도교에서는 수운대신사의 심법을 이어받아 사사상수(師師相授)하는 자재연원(自在淵源) 조직이 있다. 이는 창도시대와 은도시대에 있어서 지하운동으로 조직을 확대 강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몫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현도시대인 오늘날에도 정신적인 지도 교화에 커다란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1884년 12월에 해월신사가 강서(降書)로 다음과 같은 육임제(六任制)를 제정 실시하였으나 이것이 천도교의 교화적 교도(敎導), 원직제도(原職制度)의 효시(嚆矢)다. 육임제의 직제는 교장(敎長), 교수(敎授), 도집 (都執), 집강(執綱), 대정(大正), 중정(中正) 등이다.

또한 접(接) 조직과 포(包) 조직을 통하여 연원조직을 이끌어 오기도 하였고, 1892년에는 연원조직을 통솔 강화하기 위하여 서울에 중앙총부를 설치하고 주직(住職)인 중앙총부 임직원을 두어 교무를 관장케 했고 각 지방에는 교구를 설치하여 현도시대에 부합한 조직체제를 갖추어 오늘에 이르렀으니 시대의 변천과 더불어 조직의 개편도 단행하면서 정진하고 있음을 여실히 알 수가 있다.


3) 천도교 운동사

천도교의 운동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천도교는 백여년의 역사 과정에서 줄기차게 후천개벽운동(後天開闢運動)의 일환으로 사회개벽과 민족운동을 전개하여 왔다.


(1) 대신사 신원운동

1892년 해월신사 지도 아래 충청관찰사 조병식에게 대신사 신원의 글을 보냈다. 삼례집회(參禮集會)는 해월신사의 명에 의하여 1892년 11월 1일에 동학의 각도 두령이 도인을 거느리고 전주 삼례역에 모여 일대 시위와 더불어 해월신사께서 전주 감영에 교조 신원의 글을 올리고 1893년 2월 해월신사는 선사(先師)의 신원과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광화문전에서 복합상소를 했다.


(2) 갑오동학혁명운동

1894년(포덕 35) 3월 21일 전라도 고부에서 동학혁명의 횃불이 올랐다. 동학혁명은 도탄에 빠진 창생을 구하고 나라를 튼튼한 반석위에 두고자 낡고 썩은 불합리한 조선왕조의 봉건제도를 타도하자는 반봉건 혁명이요, 외세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을 지켜야 한다는 구국제민(救國濟民)운동이요, 백성은 억압과 착취 학대로부터 벗어나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선구적 인권혁명이었으며 조국을 근대화, 자주화, 민주화하자는 개벽운동이었다. 동학혁명을 통하여 30여만의 동학군이 희생당하고 갑오년(1894) 11월 11에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의 신식무기와 화력 앞에 처절한 패퇴를 당했다.

그러나 동학혁명의 횃불은 꺼지지 않는 불멸의 불길로 민족의 가슴 속에 불타고 있다. 후대들의 혈맥 속에 용솟음치며 민족사의 맥박을 고동케 하고 있다.


(3) 갑진개화 혁신운동(甲辰開化 革新運動)

천도교는 갑오동학혁명 이후 모진 탄압과 역경을 무릅쓰고 꾸준히 교세를 확장하면서 기회를 엿보던 중 10년만인 1904년(포덕 45) 갑진년에 이르러 다시 개화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이 운동은 첫째로 근대적 민족주의운동이었다. 둘째로 개화혁신운동이었다. 셋째로 우리나라 최초의 민중을 기반으로 한 정당 조직의 효시로써 놀라운 민권의 신장을 보여준 운동이었다. 넷째로 문화혁명으로써 전래의 고루한 풍습과 문화의 개벽을 단행한 것이었다. 이처럼 이 운동은 단순한 개혁의 차원을 넘어서 사회·경제·문화 전반의 개혁운동이었던 것이다.


(4) 3·1독립운동

한일합방의 국치를 당한지 10년 만인 1919년(포덕 60) 3월 1일 의암성사를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의 이름으로 조국의 독립이 세계만방에 선포되고 전국의 남녀노소가 일제의 총칼 앞에 맨주먹으로 총궐기하여 독립만세를 외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암성사께서는 천도교의 제3세 교조로서 조국광복을 염원하여 일찍부터 여러면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힘을 기르고 준비를 다하여 오다가 드디어 3·1 운동을 거사하는데 있어서 민족의 영도자로써 위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3·1운동은 민족의 정기를 선양하고 일제의 폭압 만행을 세계에 폭로하여 세계 여론과 국제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결과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후 연합군으로 하여금 한국의 자주독립이 약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8·15 해방과 더불어 3·1운동은 대한민국 건국의 기초를 이루고 3·1 정신은 헌법 전문에 밝혀진 바와 같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 이 나라와 더불어 길이 빛나게 된 것이다. 이 외에도 오심당(五心黨)운동, 무인멸왜기도운동, 해방 후 북한에서의 3·1재현운동, 영우회운동 등 많은 민족운동이 전개되었다.


4) 교단을 상징하는 교기 및 마크

천도교의 교기는 궁을기(弓乙旗)다. 천도교가 현도되면서 교기의 필요성을 느낀 의암성사는 ‘나에게 영부(靈符)가 있으니 그 형(形)은 태극이요 또 다른 형(形)은 궁궁(弓弓)이라’고 하신 한울님의 계시인 궁을영부(弓乙靈符)를 체로 삼아 7일간이나 깊이 생각하여 만든 것으로 1906년 2월 11일에 천도교중앙총부 현판식과 동시에 게양했다.

천도교를 상징하는 마크는 궁을 마크다. 궁을(弓乙)은 천도를 상징하는 영부의 형태다.


 ▶ 교 의


1. 신앙대상


① 천도교에서는 믿음의 대상을 ‘한울님’이라고 한다.

② 한울님은 높고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몸에 모시고 있으며, 사람마다 거룩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다. 이를 시천주(侍天主)라고 하며,

③ 인간은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존재로서 이에 한울이다 라는 인내천(人乃天)의 새로운 신관을 보여준다.


2. 교리개요


천도교는 한울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하여 돈독한 믿음으로써 한울님 모심을 깨달아 수심정기(守心正氣)로써 참된 삶의 길을 추구하며 객관적으로는 자아의 인격완성을 기하고 국가 사회적으로는 보국안민(輔國安民)·포덕천하(布德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지상천국(地上天國)건설을 목표로 한다. 시천주(侍天主)를 근간으로 삼고 사람 대하기를 한울님 대하듯이 존엄하게 대하라는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관과 정성, 공경, 믿음의 수행덕목을 실천하여 동귀일체(同歸一體)로써 후천개벽의 새한울(新天), 새땅(新地), 새사람(新人)이 되게끔 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3. 경 전


1) 동경대전(東經大全)

포덕문(布德文), 논학문(論學文), 수덕문(修德文), 불연기연(不然其緣), 탄도유심급(嘆道儒心急), 전팔절 후팔절(前八節 後八節), 필법(筆法), 좌잠(座箴) 기타 등


2) 용담유사

교훈가(敎訓歌), 안심가(安心歌), 용담가(龍潭歌),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 도수사(道修詞), 권학가(勸學歌), 도덕가(道德歌), 흥비가(興比歌), (부)검결(劍訣)


3) 이 외에도 해월신사 법설과 의암성사 법설 등 많은 법설이 있다.





4. 기본주문 및 일반주문


주문(呪文)은 천인합일(天人合一)하게 하는 발원문으로서 한울님을 위하고 한울님을 우러러 내 몸에 모시는 글이다. 교인된 자는 수시로 독송(讀誦)함으로써 도성입덕 되게 하는 법문인데 21자 주문, 13자 주문, 신사주문(神師呪文) 세 가지가 현재 사용되고 있다.


1) 21자 주문(二十一字呪文)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로써 보통 수련할 때와 특별수련할 때에 묵송(默誦) 또는 현송(顯誦)으로 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