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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도의 역사를 양위상제님의 이적, 교훈에 관한 말씀에 관한 것보다도 가시(可視)적인 것과 현상의 사건 중심으로 또한 중요한 공사 중심으로 진경과 도학원론에 수록되어 있는 시대 구분에 따라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로 다음과 같이 나누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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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상제님 탄강부터 대각까지 (도기전 38년 ~ 도기전 8년)

증산상제님 대각에서부터 화천까지 (도기전 8년 ~ 도기전 1년)


도기전 8(1901. 신축)년 7월 초5일, 증산상제께서 전주 모악산 대원사 칠성각에서 49일간의 두문(杜門) 수도 하셔서 몸소 삼계의 무극주로써 구천상제의 당체이심을 대오자각 하신 것이 태극도의 시발점이 된다.

상제님의 탄강하신 전후를 살펴보면 범인들과는 신이(神異)한 일들이 많으니 진경에서 보면,

태몽이 큰 불덩이가 몸을 덮고 천지가 광명해진 것은 혼미한 세상을 광명하게 구제할 것을 상징한 일이며 향기와 서광이 7일간 집안에 가득했던 일이며 얼굴이 금산사 미륵불을 닮은 듯 준수하신 일은 미륵불 재림과 연관성을 가지는 일이며 양미간에 불표(佛表)가 있어서 범인과 구별되는 일들이 모두가 기사(奇事)로써 그의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중요한 일이라 할 것이다.

유소시절에는 호생의 덕이 많은 천품을 볼 수 있고, 생이지지(生而知之)의 높은 경지와 15세에 유교, 불교의 경전들과 제자백가서를 섭렵하셨다.

20대 초반에는 가사와 학문에 전념하시다가 27세때부터 견문을 넓히고 세정(世情)을 살피기 위해 8도강산을 주유하신다.  박람강기(博覽强記)와 타심통(他心通)의 혜식에 모든 사람이 신인의 출현이라 칭송하였다.

31세 때 종전의 경륜과 법술만으로는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신 후 전주 모악산 대원사(母嶽山 大願寺)에서 수도에 전념하신다.  출입문을 잠그게 하시고 문틈조차 밀봉한 후 49일간을 두문(杜門)수도에만 전녀마시다가 드디어 천지의 대도를 깨달으신다.

무극주 구천상제께서 행하신 많은 공사를 일일이 다 소개할 수는 없지만 먼저 강세하시기전 천계에서의 경위를 찾아본다.

     
 

"원시의 신·성·불·보살이 회합하여 이와같은 3계의 겁액을 상제 아니면 광구할 수 없다고 호소하므로 내가 이에 서천서역 대법국 천계탑에 내려와서 3계를 주시하고 천하를 대순하다가 이 동토에 거쳐... 모악산 금산사... 미륵금신에 임하여 30재를 경하면서 최제우에게 천명과 신교를 내려... 그러나 제우가 능히 유교의 구형을 초월하지 못하고 무극 태극의 진법을 천명... 하지 못하므로 드디어 갑자년에 천명과 신교를 거두고...
8년이 되는 신미년에 내 몸소 인신으로 강세하였노라." (무 2:34)

"내가 3계공사를 주재함은 천지신명이 모여 3계를 바로 잡아주기를 호소하므로 내 몸소 강세함이니라." (무 9:76)

"나는 3계 대권을 주재하여 조화로써 천지를 개벽하고 불로불사의 선경을 열어 비겁에 빠진 중생을 건지려 하노라." (무 2:5)

" 이제 혼란하기 짝이 없는 선천 말대의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비겁에 빠진 인간과 신명을 광구하여..." (무2:20)

"천지도수를 정리(正理)하고 신도를 조화하여... 상생의 도로써 후천 선경을 열리라." (무 2:24)

 
     

 

이렇게 강세 이유를 밝히시고, 이때부터 삼계공사(천·지·인)를 시행하시니 다음과 같다.

     
  冥府公事(명부공사), 太乙呪公事(태을주공사), 神明(神政(신정))公事(신명공사), 解寃公事(해원공사), 地運統一公事(지운통일공사), 四明堂公事(사명당공사), 五仙圍碁公事(오선위기공사),
文化統一公事(문화통일공사), 世運公事(세운공사), 正陰正陽公事(정음정양공사),
男女同權公事(남녀동권공사), 道運公事(도운공사), 班商嫡庶平等公事(반상적서평등공사),
皇極神公事(황극신공사), 大神門公事(대신문공사), 人尊時代公事(인존시대공사),
白衣君王 將相公事(백의군왕 장상공사), 道統(天命(천명))公事(도통공사),
藥欌 遁櫃(天寶)公事(약장 둔궤(천보)공사), 醫統 代贖公事(의통 대속공사),
五十年工夫終筆公事(오십년공부종필공사), 大頭目公事(대두목공사),
二十七年虛度數公事(이십칠년허도수공사), 玄武經(天書)公事(현무경(천서)공사),
道通眞境公事(도통진경공사) 등이었다.
 
     

 

이 공사는 하늘도 뜯어고치고, 땅도 뜯어고치고 또 신명으로 하여금 사람의 뱃속에 출입하게 하여그 체성(體性)을 고쳐 쓰신다고 하시고 9년간 무극의 체(體) 로써 기틀을 짜신 후, 정산상제께 도통(道統)을 전승(傳承)하시니, 도로써 한 몸(以道一體) 이며, 증정지간(甑鼎之間) 이심을 밝히시고 태극의 기동(機動)도수로 풀어 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신 후 50년 공부종필(工夫終筆) 을 고하시고 도기원년(1909. 기유) 6월 24일 동곡 약방에서 화천하셨다.
증산상제께서 삼계공사를 행하신 기간은 약 7년 2개월로써 상제님을 직접 뵙고 모신 종도들은 불과 100명 미만으로 도단의 형태를 갖추지 않으셨다.

※ 참고로 甑山上帝님의 화천 이후 가르침(敎)이 전개된 것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고판례(고수부) 는 1911년 처음으로 차경석의 집에서 교단을 연다.
뚜렷한 교명을 제시한 바 없지만 그 교도들이 태을주(太乙呪)를 읽는 교단이라는 뜻에서 세간(世間)에서 태을교(太乙敎)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여기서 갈라져 나간 교단이나 다른 종도들과 그 문인(門人)들이 세운 교단까지도 태을교라 불렀다. 교단의 정식명칭은 발표한 적은 없지만 수효가 늘어나면서 증산상제의 교리가 선도(仙道)에 가깝다하여 선도교(仙道敎)라 선전하였다.
 
     
 
     
  종도 차경석 은 고수부를 모시고 있다 독단적으로 1916년 보화교를 창설하고 1922년 보천교로 바꾸었다.  
     
 
     
  종도 김형렬 은 신해(1911)년 9월 고부인이 교단을 개창하자 다른 종도들과 같이 고부인에게 문안을 올리고 대흥리를 왕래하였다. 그는 계축(1913)년 봄에 고부인을 만나서 현무경(玄武經)을 등본(謄本)하여 와서 잠심 추구하였는데, 갑인(1914)년 정월부터 차경석과 의견이 맞지않아 상종을 끊고 나와 따로 후일 미륵불교라고 불리워진 교단을 세웠다.  
     
 
     
  종도 안내성(安乃成) 은 고부인이 교단을 개창한 뒤에 전남 순천(順天), 여수(麗水) 등지에 가서 포교하다가 갑인(1914)년 봄에 본소에 왔다가 차경석과 다툰 뒤에 돌아가서 여수읍 가국리(柯局里)에 따로 후일 선도라고 불리워진 교단을 세웠다.  
     
 
     
  종도 박공우(朴公又) 는 기유(1909)년 7월 금산사 미륵전 치성 끝에 집에 돌아와 청수를 올리고 자기에게도 기운을 내려 주실 것을 기원하여 신력(神力)을 얻어 갑인(1914)년부터 정읍군 흥덕(興德)에서 포교를 시작하여 후일 박인암(朴仁庵)교단이라고 불리워진 교단을 세웠다.  
     
 
     
  종도 김형렬(金亨烈) 을 따르던 장기준(張基準)은 김형렬이 병진(1916)년 봄에 전국 360군에 360명을보내어 6무(戊)를 묻게 했을때 아무 영험이 없는 데에 실망하고, 다음해 정사(1917)년 고향인 순천 쌍암(雙岩)에 있는 국사봉(國師峰)에 올라가 수도하다가 깨달음을 얻고, 경신(1920)년 4월5일 치성을 올리고 종도 김경학(金京學)으로부터 연원을 받은 다음 후일 순천도(順天道)라고 불리워진 교단을 따로 세웠다.  
     
 
     
  종도 문공신(文公信) 은 대성께서 화천하신 뒤로 수도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유덕(有德)한 도인이라는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을 가르치다보니 무진(1928)년 경에는 오륙십명이 모여 후일 문영상(文瀛祥)교단이라고 불리워진 새 교단이 세워지게 되었다.  
     
 
     
  허욱(許昱) 은 갑인(1914)년 7월 16일 종도 이치복(李致福)과 그를 따르던 김형국(金亨國)으로부터 도를 받은 날로부터 6년 2개월이 지난 경신(1920)년 10월 3일 도의 연원을 밝히는 연원법식을 거행하고, 후일 삼덕교(三德敎)로 불리워진 교단을 세웠다.  
     
 
     
  안중건 증산교를 믿던 운산 안세찬이 증산교를 떠나 1978년 대법사 증산교로 새로 세웠고,
경전 안중건이 종정이 되면서 증산도라 바꾸었다.
 
     
 
     
  종도의 문인 체경대 는 25세 되던 갑인(1914)년에 보천교에 입교하였다가 경신(1920)년 가을에 보천교를 나와 계해(1923)년 봄에 증산대성의 탄강지인 객망리에 후일 인도교(人道敎)라는 새 교단을세웠다.  
     
 
     
  강승태(姜昇泰) 는 일찍이 보천교에 입교하였다가 물러나와 설흔되던 갑자(1924)년 음력 2월 22일 밤에 영강(靈降)하신 증산대성으로부터 도를 받고 후일 동도법종금강도라는 종교를 세웠다.  
     
 
     
  이상호(李祥昊) 는 27세되던 을묘(1915)년에 선도교를 입교하여 보천교에서 60방주에 선임되었다가 갑자(1924)년 7월 보천교에서 물러나와 대순전경을 성편한후 무진(1928)년 동지에 전북 김제시 금산면 용화동에 후일 증산교라는 새 종교를 세웠다.  
     
 
     
  김환옥(金奐玉) 은 26세때 보천교에 입교하였다가 35세되던 경오(1930)년 봄에 보천교를 물러나와그 해 7월 1일 신력(神力)을 얻어 후일 보화교(普化敎)라 불리워진 새 종교를 세웠다.  
     
 
     
  정인표(鄭寅杓) 는 정유(1897)년 음력 12월 23이 전북 완주군 소양면(所陽面) 대성동(大聖洞)에서 출생하여 점점 자라면서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중생을 건질수 있을까 하고 노심초사하였다. 38세되던 갑술(1934)년 1월 8일 전주 교외에 있는 퇴락한 미륵당에서 천신(天神)의 음성을 듣고 도리를깨쳐 미륵불교를 세웠다.  
     
 
     
  증산대성의 외동따님 강순임(姜舜任) 은 갑진(1904)년 음력 1월 15일 출생하여 6세때부터
부친 증산대성을 여의었다. 강순임은 4세되던 정축(1937)년 11월 전주 남고산성(南固産城)에서
성부(聖父)께서 주시는 불덩이를 받고 신력(神力)을 얻어 후일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라
불리워지는 새 교단을 세웠다.
 
     
 
     
 

여원월(余圓月) 은 정해(1887)년 음력 3월 19일 경남 하동군 하동읍 화심동에서 출생하여 어려서부터청수를 떠놓고 수도를 하여 이인처녀라는 말을 들었다. 35세되던 신유(1921)년에 보천교 교인을 따라 정읍군 대흥리로 이거하였는데 17년 뒤인 무인(1938)년에 서상섭(徐相燮)등이 교주로 받들어 후일 모악교라고 불리워진 교단을 세웠다.

증산상제님 화천 직후에 증산종단에서 이름있는 큰 교단에서 부터 이름없는 여러 교단을 합쳐
수십 교단이 세워지고 신도들이 여기저기 모여 든 것을 보면
증산상제께서 말씀하신 " 나의 일이 장차 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로 각색(色)이 혼란스럽게 일어나물중전(物衆廛)본을 이루리라 그러나 다시 진법이 나오리라" 하셨던 것처럼 증산상제님 화천후에 증산종단의 여러 교단이 창립되어진 상황을 보면 가히 진시황사후에 초나라 장수들이 벌떼처럼 일어선초장봉기지세(楚將蜂起之勢)처럼 교단이 창립되었고, 신단에 모셔진 여러교단의 신앙대상과 숭앙대상을보면 물중전의 물건처럼 다양했고,... 상제님의 존호도 각양각색이여서 살펴보면,... 만법화권강성상제, 옥황상제, 증산천사, 미륵불, 천황, 증산미륵세존, 증산신성, 천지원존, 구천미륵불, 증산대성, 증산대법사, 통천상제, 미륵세존, 미륵상제, 무성상제, 구천상제, 증산도주 등 대충 이러하였다.
경전이 편찬되지 않은 가운데 구전된 단편적인 성훈을 바탕으로하여 이루어진 교의는 체계를
말할수 없는 잡다(雜多)한 것이었다.
그러나 증산종단의 신생교단은 교단의 수효로 보나 교세로 볼 때 기성종교를 압도하는것 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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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산상제님 봉천명부터 무극도 개창이전

옥황상제님께서 도력 기원전 14년 을미년(乙未年) 음력 12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에 강세하시는 성은 조, 본관은 함안, 어휘는 철제, 어자는 정보, 어호는 정산이시다. 어릴때부터 총명, 영특하셔서 주위에서 찬탕이 자자하였고

7세때(1901년)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강독에 막힘이 없으시고 홀로 육갑(六甲)과 월력(月曆)의 구성법을고안하시고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섭렵하였다.

9세때(1903년) 12월 어느날 꿈에 한 선비가 나타나 상제님께 사배를 올리므로 "누구시뇨 "하시니 "저는 천제님의 명으로 진인을 알현함이옵나이다" 하셨다.

11세때(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조부께서 순국(殉國)하시면서 이때 정산상제께 "남모르는 공부와 남잘되게 하는 공부로써 일세의 사표가 되라"하시고 가족들에게는 "태몽에서 얻은바와 같이 범상한 인물이 아니니 부디 공부를 잘 시키라" 하식 운명하시었다.

13세때(1907년)학문은 문자공부에 불과하고 문자는 지난시대의 성현군자와 문장재사들의 생각에 불가하오니 큰 뜻을 이루기 위해 남모르는 공부를 전념하신다고 하셨다.

14세대(1908년) 부친의 3형제분이 구국운동을 위해 화승총을 구입하고 공장을 차려 화약을 제조하시다가왜헌에 밀고되어 도피하는 처지가 되었다. 도주님의 진언에 따라 부친 형제분이 먼저 수둔구에 망명할 곳을 정하셨다.

이듬해인 1909년 전가족이 망명길에 오른다. 이때 창원역에 출발하여 대전 부근에 이를때 신인이 현현하셔서 "그대는 삼계의 진주(眞主)니 이는 막중한 천기라, 나의 도통(道統)을 이어 광구삼계(匡救三界)하리라. 그대의 호가 정산(鼎山)이니 나와 그대는 증정지간(甑鼎之間)이며 이도일체(以道一體)니라. 나는 구천의 천존상제로다." 하시니라.

이 신인(神人)이 구천상제이심을 깨닫는 동시에 "봉천명(奉天命)과 태극진주(太極眞主)" 임을 대오자각 하시니 이것이 곧 도의기원으로 삼고 도력의 기점 이 된다.

이 봉천명의 사실은 망명지인의 중국 요녕성 성도(省都) 심양의 지명이 봉천(奉天) 으로 지명이 바뀌었다가 그 후 다시 심양으로 고쳐지니,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적 3계운도의 계합인 것이다. 이로써 구천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무극의 체(體) 인 삼계공사의 기틀을 옥황상제께서 50년의 고행을 통해 태극의 용(用) 으로 풀어 완성시키는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이역 만주에서 망명생활은 고난속에서도 구국의 집념으로 고국에 있는 동포들의 망명길을 돕기도 하고, 만주에 망명중인 동지들을규합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심에 일체의 경비를 전담할뿐 아니라 무의무탁한 동포들에게 주택과 식량을나누어 주어 정착시키니 불과 몇년만에요녕성 수둔구는 거대한 한인집단촌이 되었다. 망명생활중 주경야독하다 아버님께 "저는 4월 28일 망명길에 15세에 도강이서하여 정진주(定眞主)의 도수와 치천하의도수로 광구삼계(匡救三界)하라 하시는 천명(天命)과 신교(神敎)를 받들어 모셨나이다.
주경야독의 공부만으로는 부족하므로 이제부터 상제님의 천명을 받들어 노고산에 들어가 진법도수공부에만 전념하려합니다."말씀드리고 홀로 두문불출하시고 불철주야 공부에 전념하였다.
증산상제님께서도 깨달은 뒤에는 수도를 하셨듯이 정산상제님께서도 수도공부를 하셨는데 그 기간이 장장 9년이나 된다.

1917년 원조(元祖) 에 초패왕의 고향인 절강성 회계에서 "이제 나의 도수에 따를 그대의 대중화 보은공사가 끝났으니 본가로 돌아가서 도통(道統)의 연맥과 인계(人界)의 인연을 다지도록 하라. 이는 곧 득도(得道)이니라." 는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주문과 받으시고 노고산 공부처로 돌아오셔서 이해 윤 2월 10일 득고 치성을 봉행하셨다.
4월 28일 봉천명 치성후 다시 증산상제님의 계시를 받으니 "중국공부도수를 마쳤으니 환국하여나의 본소를 찾고 나의 삼천(三遷)중 천서(天書)와 천보(天寶)를 받도록 하라" 는 명에 따라 9년만 에 고국땅을 밟게 된다. 신의주, 서울, 외가인 밀양, 회문리를 거쳐, 본소를 찾기 위해 증산상제님의 성지, 유적지와 그 종도들을 찾으나 찾을길이 없어 계시에 따라 안면도로 들어가셔서 첫 포교활동을 하게 되었는데, 그 첫 신도가 이정률이었다. 한편 그해 겨울에는 만주에 남아있던 나머지가족들이 모두 안면도로 돌아왔다. 안면도를 근거지로 포교하자, 신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1918년 10월 에는 포교의 근거지를 정읍으로 이주하여 증산교도들을 찾아 증산상제님의 행적을 연구하는 한편, 이곳에서의 포교활동으로 전라도 지역에서도 수십 명의 신도가 입도하였다.

1919년 명절치성을 올리신후 "내가 봉천명한지 10년이 되었으나 본소를 찾지 못하고 도체(道體)도 갖추지 못하였으니, 금년에는 정녕 이루리라"하시고, 정월 15일에 증산상제님의 계시로 증산상제님의 모친을 비롯한 유족을 찾게된 정산상제님은 증산상제님이 화천하시기 10년전, 화천 당년 정월 15일에 집을손수 수리 도배하시고,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에게 "이곳이 나의 본소(本所)이니라. 너는 이곳에 살다가 10년 후 이날이 본소를 찾는 후천진인 을미생에게 나의 도통을 전하라" 라는 분부를 받은 선돌부인을 만나 방의 벽속에서 도통계승의 증표인 천서(현무경, 주문)을 전수 받게 되었다.

이어서 9월18일 저녁에 천하장사 등 도인 8인을 거느리고 보천교 도장에 가셔서 천보(天寶)인 둔궤(遁櫃)를 모셔오게 된다. 선덕부인이 둔궤를 보시고 "10년간의 삼천(三遷)끝에 진주에게 돌아왔으니 천행(天幸)이로다" 하셨다. 이듬해인 1920년(경신년) 양력 4월 5일, 이전에 몇차례 열려고 했던 둔궤가 정산상제님께서 태을주를 연송하시고 주대를 끼우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어나며 열리게 된다.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과시천보로다. 수운이 거년 경신 4월 초5일은 음력이로되, 나의 금년 4월 초5일은 양력이니 음양합덕이며 태극도수가 분명하도다." 하셨다. 이로써 15세에 봉천명하고 도강이서(渡江而西)하고 정진주지도수(定眞主之度數)하여 만 10년의 무극대도의 진주가 갖추어야 할 삼천(三天)을받들어 도통전승(道統傳乘)의 증표(證標)를 완비하시고, 그후에도 단도수, 검무도수를 계속하였다.

1921년 4월 28일 통사동 공부처에서 무극대도를 선포 하시고, 도주에 취임하여 신앙의 대상이 "구천상제"이심과 도호가 "정산"이심을 선포 , 임원을 임명하여 도체(道體)를 갖추게 되었다.

 
     

 

     
 

무극도 선포이후 해산까지

무극도(无極道)시기는 무극대도를 선포하신 도기 13년(1921. 신유) 4월 28일부터 도단이
해산이 된 도기 28년(1936. 병자) 1월 1일까지 약 15년의 기간을 말한다.

1921년 4월 무극대도를 선포하시고 본격적인 포교활동을 전개하셨다. 5월에는 회문리 고기(故基)를 복원하시고, 8월에는 통사동 공부처에서 백일공부하시고, 9월 초5일에는 증산상제님 초빈에 고천의례를올리신 다음 성골을 통사동 공부처로 옮겨모시게 된다. 이것은 증산상제님의 도통(道統)을 이어서 세운 진주(眞主)이나 생전에 증산상제님을 직접 받들어 살피지 못하였으므로 이와같이 모심으로써 천의(天意)을 받드는 것이 된다.

9월 19일 치성때 구천상제님의 성령 봉안처로서 도장영건의 "원납도수"로 추진위원회가 구성된다.

1922년 원조에 "현무음해도수"가 있을 것을 말씀하셨고, 2월 23일에 다른 증산계열의 신도들이 난입하여증산상제님 유해를 훔쳐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혼란중에 성골의 일부가 없어지기도 했다. 그후에도 그들은 "좌수성골과 둔궤 그리고 도장기금을 내놓지 않으면 죽인다."협박하고 이로인해 경찰서로 연행되었으나 상제님에게서 피해자이심이 판명되어 환어하시고 폭도들은 구속기소되었다. 3월 중순에 통사동 공부실을 폐쇄히고, 9월에 서울 도화동, 돈암동, 적선동에서 각각 100일씩 공부를 마치시고, 1923년 원조에 하교하시기를 "삼처삼도(三處三度)공부로써 "서울도수"를 마쳤으니 진법이 서울서 전토(全土)에 퍼지며 세계 전역에 미친다고 하셨다. 조선의 서울이 태극의 중심이 되고 일갑이 지나면,만국민이 서울에 와서 세계일가의 기틀을 다지며 환호하는 날이 있으리라"하시며, 그러나 그대들은 새 서울이 따로 있음을 알라고 하셨다.

6월24일 회문리 고기에서 대치성을 봉행하시고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의 계해년임을 말씀하시고전도문을 내리신다. 음해도수로 일시 중단한 도장영건 사업에 다시 박차를 가하고, 도장의 기지(基地)는구천상제님께서 이미 비장(秘藏)하신 곳으로 도창현은 구천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이곳이 군신봉조지국(君臣奉詔之局)이며 상유도창(上有道昌)하고 하유대각(下有大覺)하니... 운회지지(運廻之地)니라."하셨으며, 또한 현무경 세권을 만드셔서 그 중 한권을 도창현에서 소화하신 곳이기도 하였다.

약 5천 5백평의 대지 위에 3년에 걸쳐 을축년(1925년) 4월 15일에 도장의 주요 건물인 영대와 도솔궁이영건되어 상층을 구천상제님 영위를 봉안하고, 하층을 집회장으로 하여, 전체 건물의 동수는 19동이며 총칸수는 240여칸으로 웅장하였다.

4월 28일 봉천명일에 도장영건을 겸한 영대봉안치성을 봉행하고, 증산상제님 존호를 신격위로는"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님", 인격위로는 "강성증산상제"님으로 봉대하였다. 이날 치성에서 무극도의 취지서를 포유하시고 이어 신조와 강령, 요체, 그리고 도규를 제정 공포하고, 치성의 절차 순위와 전수진설을 법제하시고, 갑기일(甲己日)주일을 정하시고, 기도봉행도 법제하셨다. 대도의 기구와 신앙체계가 완비되니, 불과 몇년사이에 도인의 수가 10만을 넘었다.

참고로 무극도 본부 건물을 대내적으로 짓고, 종교조직을 새롭게 정비하던 시기는 보천교에서는
차경석이 갑자년(1924년)에 등극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는데, 실제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자 보천교내부가 어수선하던 때였다. 차경석에 대한 예언이 빗나가자 그 예언은 새롭게 부상하는 태극도로 쏠리게된 것이다. 특히 차경석과 마찬가지로 정산상제님의 무극대도도 증산계열에 속한 교단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설득력이 큰 것이었다.

그러나 정산상제님께서는 "일국사(一國事)에 국한하는 군왕사업(君王事業)이 아니고 전인류 나아가서는삼계전체를 개벽, 광구하여야 하는 공사이니 외부사람들이 나를 조천자로 호칭하더라도 너희는 현혹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9월19일 치성을 마치고 각도문을, 1928년 원조 치성후 포유문을 내리셨다.

또 1934년(갑술년) 설날 임원들에게 "내가 봉천명한지 이제 26년이니 머지않아 무극주께서
구천상제님 제위에 임어하시게 되느니라. 각자 납폐지 10만장씩을 백일이내에 소화하라"하셨고이해 3월 9일 금산사 미륵존불이 원인모를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신기하게도 원팔은 소실되지않고 양협시불과 불전에도 연소되지 않았다.

1928년 청장년층 도인들을 규합하여 진업단(進業團)을 조직하였다. 이것은 도인들의 생활안정과
산업장려, 빈민층 구제를 위한 것으로, 단원들은 각 지역의 수리(水利), 개간, 간척사업 등을 활발히
진행하였다.

1930년에는 진업단의 인원을 늘려 북만주의 목단강 부근, 함경도 무산 등지로 보내 2년간 벌채사업을 벌였다. 벌채사업이 끝나자, 안면도와 원산도의 간척사업에 들어갔다. 안면도는 창기리 앞바다를 막아80여 정보, 원산도는 50여 정보의 논과 염전을 확보하였다. 이외에도 전주와 음성 등 전국 각 지역의 광산업에도 손을 대 이 가운데 몇몇 곳에서 엄청난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그러나 왜정당국에서 허가수속미비, 불법토석채취 등을 구실로 내세워, 안면도 간석지는 왜인회사 마생이, 원산도 간석지는 보령군이 강탈했다. 이때 억울함을 상고함에 상제님께서는 "도시 도수니라. 조수와 토지를 조화시켜 해원하였으며 많은 빈민이 품삯으로 생활하였고, 경작지를 얻어 구제되었으니, 누구에게 돌아감을 탓하지 말라. 장차 두고보면 내가 시범한 뜻을 알게 되리라."하셨다. 일제는 더욱 심하게 종교탄압을 가해서,
결국 1936년 유사종교 해체령을 내리게 된다. 이로인해 모든 민족종교들이 해체되는 쓰라림을
겪게 되었다. 무극도의 본부도장 건물도 다른 교단들의 부동산과 마찬가지로 모두 일제가 몰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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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도 해산 이후 태극도 중창까지

잠룡기는 도기 28년(1936년 병자) 1월 2일부터 도기 37년(1945년 을유) 7월 7일까지 10년간 즉 무극도 해산이후 태극도를 하명하시기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1935년 12월초에는 조선총독이 전라북도 지사 고원훈을 보내어 천서를 전달하고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민화정책(皇民化政策)에 동조할 것을 여러차례 요청하였으나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나의도는 도인을 해산시키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심한지 이미 오래이니 다시는 도에 대한 일을 거론하지 말라." 하자 조선총독부는 소위 종교단체해산령을 내린다. 정산상제께서 앞서 말씀하셨던 1928년 추석 치성때 도운(道運)에 관해서 "나의 도가 도운성화(道運盛花)의 국격(局格)이니라. 그러나 개화(開花)에는 낙화(落花)의 도수가 따르느니라." 하시고 다음과 같은 한시 한 수를 읊어 주셨다.

戊辰年來開花期 己巳町寧滿發期 庚午辛未無限量 乙丙之間落花期

무진년래개화기 기사정녕만발기 경오신미무한량 을병지간낙화기

또 1935년 추석 치성때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니 그 때가 바로 증산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이므로 "낙화도수(落花度數)"와 "잠룡도수(潛龍度數)"니 꽃은 낙화요, 용(龍)은 잠룡(潛龍)이니라. "27년간 허공부, 허도수가 이 시기이므로 나는 다시 입산수도 할 것이요, 그대들은 각자 귀가하여 내가 다시 찾을때까지 때를 기다리라." 하시고 그해 그믐날 명절치성전야에 다시 말씀하시기를 "도는 낙화도수로서 결실을 기다려야 하고, 나는 잠룡도수로서 "회룡도수(廻龍度數)에 들어감으로, 다시 입산수도 할 것이니 그대들은 가업에 종사하고 내가 찾을때를 기다려라. 잠룡은 물용(勿龍)이나 현룡(見龍)을 기(期)하고 낙화는 비정(非情)이나 결실을 위함이니 결실전에 요동하면 화가 있으리라. 1년이 될지, 3년이 될지, 10년이 될지라도 나와 도를 믿고 기다려라." 하시며 훗날을 기약했다. 또 10년전인 도기 18년(1926년 병인) 4월 회문리에 회룡재(廻龍齎)를 건립하게 하셨고, "이는 후일을 예비하는 도수니라"하신 이곳이 잠룡기의 주요 공부처가 된다.

도주님께서 회룡재에 은거하시며 외부와의 연락도 금하시고, 잠룡하신 이래 10년간 하루도 쉬지 않으시는 도수공부로 말할수 없는 고초를 겪으시고, 시국은 왜의 폭정이 극도에 달했고 도단의 생활도 몹시 어려웠다.

1942년 회룡재에서 "이제 머지않아 새옷으로 갈아 입으리니 그대들도 포덕에 더욱 힘쓸것이며, 이 도장을 "회문도장(會文道場)"으로 부르도록 하라."하셨다. 태평양 전쟁에서 전세가 불리해진 왜의 폭정이 날로 심하여 사상적으로 혐으를 받으면 생명이 위협되는 정세이므로 어려움이 막심하였다.

1944년 가을 어느날 말씀하시기를 "내 나이 이제 지천명(知天命)이며 득도한지는 만 27년이라. 이제 이윤의 50에 시지사십구년지비(始知四十九年之非)와 홍성문의 27년간 허공부"의 도수를 마침이니 앞으로 인덕도수와 법공부라야만 된다 말씀하셨다. 또 창생해박(蒼生解縛)을 위하여 시행하신 해방도수(解放度數)의 공부때에는 법수의 얼음이 솟아올라 수염의 고드름과 연결될 정도의 어려움을 겪으시며 계속하셨다.

을유년(1945년) 명절치성후 임원들에게 "잠룡한지 10년이 되었고, 태아도 10삭이면 출생하고, 잠(潛)되 회(廻)하면 현(見)하고 비(飛)하는 법이라. 나의 도는 이제 이름만 지으면 되느니라" 하시고, 해방 5일전에 과거의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내 오늘은 그대들에게 태극의 진리를 도상(圖像)으로 설명하려 하노라. 이는 우리 도의 연원(淵源)이며 또 우주 전체의 생성발전하는 대원리니라" 하며 몸소 태극과 팔괘의 도형을 그려 보시며 "이것이 태극도(太極道)이니.. 우리 도의 도기(道旗)니라. 이 나라에서 상고(上古)로부터 음양사상 또는 상제신앙(上帝信仰)과 함께 전래하더니 구한국에서는 이를 국기로 하였느니라. 지금은 왜(倭)가 이것을 금기하고 있지마는 만유군생(萬有群生)의 근원이 바로 이것이니라."하시고 태극기를 동구밖에 세우도록 하셨다.

5일째되는 7월 초5일(양력 8월 15일) 해방을 맞자 임원들에게 "그동안 무극의 표징인 왜기가 이 강토를 덮었으나 이제는 태극도(太極道)의 국기가 휘날리니 이 곧 태극의 기동이니라. 왜가 무극대운의 일을 도와 주었으므로 내가 무극대도로 27년의 허령도수(虛靈度數)를 마쳤으며, 그후 10년간 "잠룡, 지각도수" 역시 마쳤으며 구천상제님의 일은 무극대운이요 나의 일은 태극대도이므로 오도가 지금까지는 무극대운의 "기초동량도수"이었으나 금후로는 태극의 "기동도수"니라. 증산상제님과 나는 "무극과 태극의 관계며 증정지간(甑鼎之間)이니 도로써 일체니라"하시고 태극도주가 되었음을 알리고 도명은 공표하지 말라 하셨다.

 
     

 

     
 

① 제1기 정산상제님께서 태극도의 도명을 정식 공포하신 때부터 화천하신때까지의 기간
② 제2기 정산상제님께서 화천하신다음 제 3대 도전 박한경씨가 재임했던 기간
③ 제3기 박한경씨가 떠나고 조영래씨가 제 4대 도전으로 재임한 기간
④ 제4기 제 5대 도전 이갑성씨(제 6,7,8대 연임), 제 9대 도전 송재현씨(제 10대 연임), 제 11대 도전김영복씨(제 12대 연임)가 재임하여 현재에 이른 기간

① 제 1 기

잠룡 지각도수의 10년 포태기를 거쳐 1945년(을유년) 해방과 더불어 도명을 태극도로 명하셨으나 세상에 드러나지 말라 하셨으니 이 기간은 강보에 쌓여 있는 3년의 장생기이며, 마침내 1948년(도기40.무자) 원조에 도명을 태극도 임을 만천하에 공식 선포 한때 부터로 태극도 시대가 되는 것이다.

태극도의 공식 선포와 더불어 도본부를 부산으로 옮겨야 됨을 하교하시기를 "부산은 이 강산의 동남돈에 위치한 도시로서 국토의 신산 백두에서 금강 태백으로... 정기가 응결되고, 낙동강과 동해가 굽이치는 산진수회처(山盡水廻處)의 영국(靈局)이니라.

...만방의 물화가 통하는 군창지이고, 생문방이며, 새서울이니 대해(大海)라야 대어가 살고 대지라야 대신명이 임함이니라. 증산상제님께서도 소 백두(百頭)를 대신한 백우(百牛)로 공사보셨으며, 내가 장차 금산사(金山寺)로 들어가리라." 하신곳이 바로 이곳이니 천장길방(天藏吉方), 태극원점(太極原點)의 기지(基地)를 입금산이라야 얻을 수 있느니라' 하셨다.

그리고 이해 3월 15일 부산 보수동으로 공부처를 옮기시고 처음에는 부산행재소로 명명하시다가 이듬해 원조에 부산도장으로 개칭하셨으며 그후 1956년 7월 보수도정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불리고 있다.

1949년 4월 28일에 급증하는 도단의 임원체계를 제정하였는데, 지방단위로 포덕 호수 5백호 포감, 150호에 선도사, 50호에 선도원으로 정했는바, 포감에 이용직, 안상익, 김태만, 김명구가 임명되었다.

1950년(도기 42, 경인) 원조 치성후에 금년에는 도 내외에서 몰아닥칠 환란의 고비 따르는 '복중80년도수'가 있을것이라는 말씀이 있으신 다음날인 1월2일에 정산 상제님을 위시한 임원이 모두 중부 경찰서에 연행 심문 받은 일이 발생하였다.

며칠동안 중부산서 유치장에 구금되었다가 경북 도경으로 이송되고, 다시 예천경찰서에 설치된 경북지구 계엄사령부 군경합동수사대로 이송되었다.

이 이면에는 배도자인 강모, 김모가 전 군정청 통위부장을 지낸 유동열씨가 보화교를 믿으면서 증산교단을 통합하고자하며, 태극도만 불응하고 타교단은 대부분 찬동하여 소위 증산교단 통정원을 설치하고 유동열씨가 그 대표인 통교에 취임하여 강모 등은 자신들도 통정원의 고위직이 된 기회를 이용하여 태극도를 용공단체(容共團體)로 몰아 말살토록 계엄사령부에 압력을 가하게 한것이 발단이었다.

결국 허위 날조의 모략, 중상임이 판명되어 구금 3개월만인 3월초 5일에 무사 석방되었다.

부산으로 환어 하셔서, '머지않아 삼천리 강산뿐 아니라 전세계에 걸친 수화상충(水火相沖)의 대도수로 국운도 꽉 막혀서... 강산이 초토(焦土)가 되어 무고한 창생이 무참히 살상 될 것이나 오직 일심만 가지면 무사할 것을 말씀하셨다.

이해 6월25일에 6·25전쟁이 발발했다. 그렇게 되니 모든 피난민이 부산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부산이 한국 제2의 도시로서 임시수도가 되는 동시에 도(道)에서는 각처의 도인이 부산의 도본부를 향해 모여들어 보수동 일대는 임시 도인촌이 되었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도인들에게 생계보조와 직장알선 등 여러가지로 애휼하여 생활이 안정될 뿐더러, 도인들은 상제님을 지척에서 모실 수 있고 집단 생활로써 신심과 단결이 강화되어 도인 간의 친목, 협동이 두터워져서 수복 후에도 귀향하지 않고 거의 그대로 정착하였다.

1951년에 도인수가 수천 호로 늘어 그에 대한 대책으로 구역을 정리하여 편성하니 부산지역을 중부라하고 다른 지역을 지방이라 한 것인데, 그 지방에 대하여는 연고지의 명칭을 따라 "○○방면"이라고 호칭하며 도인도 중부도인, 지방도인으로 구분 호칭하였다.

아무튼 이 동란 중, 동란 후에 중부인 부산을 향해 이주해 오는 도인들이 너무 많은 데다가 충주방면 안상익, 박한경, 유철규 등의 임원들이 도인들을 경쟁하듯 매월 수십호씩 중부로 이주시켜 경부선 조치원역은 이사짐 수송으로 바빠 다른 일을 처리못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개중에는 도인들이 '부산으로 가야만 도를 믿을 수 있다'느니 '도만 믿으면 되지 재산은 무엇하느냐' 등의 사실무근한 소문이 유포되어 마침 휴전지구 불안한 시국에 혹세무민하는 유언비어 또는 용공분자의 소행과 비슷하다는 혐의를 받게 된다. 충북도경에서는 1954년 2월 18일 청주 서운동에 있는 포덕연락소를 급습 박한경, 유철규, 김영화, 이갑성등 임원들과 도인 20여명을 체포, 압송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대다수 도인들은 3일만에 석방되었지만 박한경은 고문에 못 이겨 자신의 혐의를 시인하고 상제님의 행재까지 진술함으로써 상제님께서 법원으로 출석하게 되신다.

박한경 등 3인은 사기, 횡령 등 혐의와 함께 유언비어 유포, 용공단체조직, 국가보안법위반 등 혐의로 법원에 구속 기소되었다.

이 사건의 공판에 부득이 상제님께서 출석하셔서 당시 청주지방 법원장과 주역(周易)에 대한 논란을 했는데 의기양양했던 문모 재판장은 도주의 인품과 학식에 감복하고 이임 후에 부산까지 찾아와서 배움을 받았으며 사건은 3년을 끌다가 무죄판결을 받았다. 상제님께서 청주법원에 출석하셨다가 귀로에 청주화양동에 들러서 황극신도수와 대신문도수를 보신다.

화양동은 예로부터 중국의 무이구곡(武夷九曲)과 비슷하다고 하여 화양구곡으로 불리던 곳이다.

특히 5곡에는 송우암이 명나라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同)을 첨성대 아래 바위에 새기고 그 옆에 암벽을 함(函)처럼 파서 석개(石蓋)를 하고 이를 석문(石門)으로 이름하였다 한다.

정산상제님께서 이날 하오에 임원들을 거느리고 먼저 만동묘의 묘지와 묘비를 살피시며,

"이곳 청주 화양동은 명(明), 청(淸) 양국이 공존하는 곳이다. 내가 오늘 이곳에 온것은 황극신 도수와 대신문도수를 보려함이니라"하시고 "5곡까지 가려 하였으나 날이 저물어 신도(神道)로써 공사 하리라"하시고 보은(報恩)으로 오셔서 저녁 수라상을 받으신 수저로 상머리를 한번 치시는 순간, 그 부근 일대를 때려 부수듯 하는 뇌성벽력이 진동하며 소나기가 쏟아지는 이적이 일어났다.

상를 물리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야 신문공사를 마쳤으니 과시(果是) 보은지지(報恩池地)로다"

하셨으나 시종들은 깨닫지 못했다.

며칠뒤 청주일대에서 '화양동 5곡의 석문이 열렸다'는 소문이 퍼졌다.

소문을 확인한 도인들이 석문이 열린 그 시각에 '이제 신문공사를 마쳤다'고 하신 뜻을 비로소 깨닥고 크게 감탄하였다. 석문에 관한 일을 상제님께 아뢰니, "오직 결자(結者)와 해자